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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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5-14 04:46 조회18,09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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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이 종결되어가는 가운데 서방의 콘스탄티누스와 동방의 리키니우스만 남게 되었다. 로마 제국을 완벽히 통일하려 했던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의 내전이 한창이던 324년에 비잔티움을 공략했고, 처음에는 리키니우스군이 잘 버텼으나 콘스탄티누스의 장남 크리스푸스가 수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돌진하여 2일간 전투 끝에 배 130척과 병사 5천을 수장시킨 탓에 전세가 급격히 반전됐다. 바다의 장악으로 보급을 원활히 받게 된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결국 장악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도
황제는 비잔티움 공략전으로써 비잔티움이 몹시 가치 있는 군사상 요충지라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었다. 아시아와 유럽의 교차점으로 상업과 교역이 발달했으며 다뉴브 강과 흑해 너머의 이민족들, 동방에서 맹위를 떨치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공격에 신속하게 대응하기에도 알맞은 거점이었다. 당시 제국은 동방에서 위협이 커지는 상황이기도 했다. 마침내 324년에서 330년에 걸친 규모가 막대한 공사가 끝나고 330년 5월 11일 월요일에 개도식(開都式)이 열렸다. 도시 이름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누스의 도시)로 정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지정한 공식 명칭은 새로운 로마(Nova Roma)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별칭 내지 애칭이었다. 이제 로마 제국의 수도는 이미 이전 황제들이 외면하고 있던 로마시가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
치세 대부분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낸 최초의 로마 황제는 테오도시우스 1세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은 고착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로마의 수도가 되었다. 410년에 로마가 서고트족에 의해 약탈당할 때, 동방에서도 훈족이 도나우 강 북쪽까지 다다라 있었다. 방위 체제를 강화하고자 테오도시우스 2세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라 불리는 성벽을 건설하여 413년에 완성하였다. 이후 로마가 급속히 쇠퇴한 것과는 달리,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계속 불어났고, 시내에는 황제의 궁전이나 하기아 소피아 등의 교회, 공중 목욕탕이나 극장 같은 공공시설이 많이 건설되었고,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네포스가 사망한 480년에는 동로마 사람들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은 제2의 로마」또는 「제2의 수도」라는 의식이 싹터 있었다.
6세기에는 매년 5월 11일의 수도 탄생 기념 축제가 제국의 중요한 기념일로서 성대하게 치러졌고, 「콘스탄티노플에 새로운 로마를 건설한다」는 의식이 정착했다. 이때의 황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로, 유스티니아누스 치세에서 동로마 제국은 처음으로 융성을 맞이하여, 콘스탄티노플은 크리스트교 세계 최대의 대도시이자 전세계적으로도 최대급의 대도시로서 번영을 누렸다. 시민들에게는 빵이 무료로 지급되었고, 경마장에서는 전차 경주가 연일 열렸으며 시민들은 그것에 열광하였다. 고대 로마에서의 「빵과 서커스」라는 단어가 이 시대에까지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도
황제는 비잔티움 공략전으로써 비잔티움이 몹시 가치 있는 군사상 요충지라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었다. 아시아와 유럽의 교차점으로 상업과 교역이 발달했으며 다뉴브 강과 흑해 너머의 이민족들, 동방에서 맹위를 떨치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공격에 신속하게 대응하기에도 알맞은 거점이었다. 당시 제국은 동방에서 위협이 커지는 상황이기도 했다. 마침내 324년에서 330년에 걸친 규모가 막대한 공사가 끝나고 330년 5월 11일 월요일에 개도식(開都式)이 열렸다. 도시 이름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누스의 도시)로 정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지정한 공식 명칭은 새로운 로마(Nova Roma)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별칭 내지 애칭이었다. 이제 로마 제국의 수도는 이미 이전 황제들이 외면하고 있던 로마시가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
치세 대부분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낸 최초의 로마 황제는 테오도시우스 1세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은 고착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로마의 수도가 되었다. 410년에 로마가 서고트족에 의해 약탈당할 때, 동방에서도 훈족이 도나우 강 북쪽까지 다다라 있었다. 방위 체제를 강화하고자 테오도시우스 2세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라 불리는 성벽을 건설하여 413년에 완성하였다. 이후 로마가 급속히 쇠퇴한 것과는 달리,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계속 불어났고, 시내에는 황제의 궁전이나 하기아 소피아 등의 교회, 공중 목욕탕이나 극장 같은 공공시설이 많이 건설되었고,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네포스가 사망한 480년에는 동로마 사람들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은 제2의 로마」또는 「제2의 수도」라는 의식이 싹터 있었다.
6세기에는 매년 5월 11일의 수도 탄생 기념 축제가 제국의 중요한 기념일로서 성대하게 치러졌고, 「콘스탄티노플에 새로운 로마를 건설한다」는 의식이 정착했다. 이때의 황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로, 유스티니아누스 치세에서 동로마 제국은 처음으로 융성을 맞이하여, 콘스탄티노플은 크리스트교 세계 최대의 대도시이자 전세계적으로도 최대급의 대도시로서 번영을 누렸다. 시민들에게는 빵이 무료로 지급되었고, 경마장에서는 전차 경주가 연일 열렸으며 시민들은 그것에 열광하였다. 고대 로마에서의 「빵과 서커스」라는 단어가 이 시대에까지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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