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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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5-14 04:43 조회17,59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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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해전(東海海戰) 또는 쓰시마 해전(對馬海戰, 일본어: 日本海海戦, 러시아어: Цусимское сражение, 영어: Battle of Tsushima)은 1905년 러일 전쟁 중 쓰시마 섬 부근 바다에서 일본 연합함대와 러시아 발트 함대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노급전함을 주력으로 한 함대가 정면으로 격돌한 최대의 해전이었다.
일본 해군이 승리했고, 러시아 발트해 함대는 전멸했다. 일본에서는 일본해 해전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동해 해전이라 부른다. 이후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에서 상당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목차 [숨기기]
1 배경
2 전투 과정
3 결과
4 참가 병력
4.1 일본 제국 해군
4.1.1 제1함대
4.1.2 제2함대
4.1.3 제3함대
4.1.4 특무함대
4.2 러시아 제국 해군
5 기타
6 같이 보기
7 참고 자료
8 각주
배경[편집]
러일전쟁 중 러시아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함대를 동원한다. 하지만 일본 해군보다 3배나 많은 함대를 보유하면서도 각 지역에 흩어진 러시아 함대를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흑해 함대는 오스만 제국 때문에 출동이 불가능했기에 출동 가능한 함대는 태평양 함대[1] 밖에 없었다.
러시아 해군 사령부는 태평양함대만으로는 일본함대에 대항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발트 함대[2] 와 니콜라이 네보가토프 제독이 이끄는 제3태평양함대를 추가로 파견했다.
그러나 여기서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했는데 주력함대를 유럽에서 동아시아까지 이동시키는 일은 당시로써는 처음 있는 일이었고, 함대의 대부분이 증기선이기에 항상 석탄 공급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시로 보급할 수 있는 항구가 필요했고, 또한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야만 했다.
그런데 러시아는 이들 항구와 운하를 지배한 영국과 사이가 매우 안좋았다. 1904년 10월 21일 북해에서 일어난 도거 뱅크 사건에서 러시아 해군은 영국 어선을 일본 어뢰정으로 오인하고 공격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당시 영일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은 일본을 지지했고, 스페인에게 러시아 발트 함대에 보급을 하지 말라는 압력과 함께 영국 식민지 항구에도 발트 함대의 입항을 금지시켰다.
사실상 수에즈운하 통과도 일부 함대만 가능하여 함대를 둘로 나누어 제2태평양함대 주력은 아프리카 대륙 남쪽 끝 희망봉을 돌았고, 함대는 마다가스카르 섬의 노스베항에서 합류했다.
이후 인도양에서는 러시아의 우호국 항구는 매우 적었고, 동맹국 프랑스에게도 냉대를 받아 약 반년간의 항해는 피로가 극에 달했고, 사기도 매우 저하되었다. 제2, 제3 태평양함대는 1905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캄란 만에서 합류한 뒤 블라디보스토크를 목표로 항해를 시작했다.
한편 일본 연합함대는 동아시아에 있던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황해 해전과 울산 해전에서 격파해 무력화 시킨 뒤 발트 함대와 대결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발트 함대를 어디서 맞아 싸워야 하는 것이었다. 캄란만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항로는 3곳으로 쓰시마 해협, 쓰가루 해협, 소야 해협이었다.
러시아 함대에 비해 세력이 열세인 일본 연합함대는 이중 1곳에 전력을 집중시켜야 했다. 일단 2곳은 거리상 및 기뢰에 의한 방어가 튼튼했기에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쓰시마 해협을 통과할거라 예상하고, 한반도 남부해안에 주력함대를 배치하고 경계망을 폈다.
5월 14일 발트 함대가 캄란항을 출항했으나, 5월 19일부터 소식이 묘연했다. 발트 함대의 진로를 알 수 없게된 일본 연합함대는 초초해지기 시작했고, 발트 함대가 태평양에서 홋카이도로 향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있었다.
5월 24일 도고는 일본 대본영에 연락해 홋카이도로 이동하고자 한다는 전보를 보냈고, 대본영에서는 일단 신중하게 기다리라는 연락이 왔다. 도고는 5월 26일 정오까지 기다리다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5월 26일 오전 발트 함대의 석탄운반선 6척이 상해에 5월 25일 저녁에 입항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운반선이 함대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것은 항속거리가 긴 태평양 루트로는 가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것으로 도고는 쓰시마 해협에서 발트 함대를 기다리기로 했다. 만약 운반선이 하루라도 늦게 입항했다면 도고의 함대는 홋카이도를 향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1905년 5월 27일 오전 2시 45분, 규슈 서쪽해역 203호 지점에서 연합함대의 순양함 시나노마루가 발트 함대의 병원선 오룔의 조타를 발견했고, 뒤이어 발트 함대의 모습을 확인하고 4시 45분에 “적함 발견”이란 의미가 있는 "타타타타타"(실제 타의 연속)로 시작되는 “적함 203지점에서 나타남 0445”을 타전했다.
곧 시나노마루는 순양함 이즈미와 교대 후, 적에게 발견되지 않게 이탈했다. 이즈미는 적의 위치와 방향을 무선으로 연합함대에 통보했다.
전투 과정[편집]
1905년 5월 27일 ~ 28일의 해전
시나노마루가 야간에 병원선을 발견한것은 병원선이 조타관제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발트 함대는 시나노마루가 무선으로 통보하는 동안에도 포격을 가하지 않았고, 전파방해도 하지 않았다.
강력한 무선기를 갖고 있던 우랄 함장의 방해전파 발신허가에 대해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일본측의 무선을 방해해야 하나”라고 명령했다. 시나노마루가 야간동안 발트 함대를 관측하면서 전파를 발신하는 동안 러시아 함대는 이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당시 무선방위 측정기는 실용화 이전이었다)
5시 05분 한반도의 진해만에 대기중인 연합함대가 출항했다. 바다가 거칠었기에 원래 계획이던 기뢰작전은 하지 않고, 포격전 위주로 전투를 진행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10시 최초로 달려온 연합함대 제5,6 전대가 발트 함대를 확인했다. 11시 최초로 발트 함대에서 위협 포격을 가했고, 서로간의 포격이 벌어졌으나 전투 상태로까지 번지지 않고 일정거리를 유지했다.
양쪽 모두 1발의 명중탄도 없었으나 이때 일본 연합함대의 일부가 발트 함대 앞을 가로지르기를 몇번을 하여 발트 함대는 대열이 2열종대에서 3열종대로 바뀌었고, 순양함 함대는 후열로 밀리게 되었다.
13시 39분까지 연합함대의 모든 함대가 집결하고, 연합함대 주력 제1, 제2 전대가 발트 함대를 좌현 남쪽에서 시야로 확인하자 전투 깃발을 내걸고 전투 개시를 명령했다. 13시 55분 도고는 연합함대 기함 미카사에서 Z기를 기양하라고 지시했다. Z기는 "황국의 흥폐, 이 전투에 달려있다. 각 대원은 한층 분발노력하라."라는 의미를 가진 신호기였다.
14시 2분 침로를 남서로 정한 연합함대와 침로를 북동으로 정한 발트 함대는 반항로(평행과는 다른)상에 있었다. 14시 3분 양측 함대의 거리가 11,000m까지 접근했다. 거리 8,500m 에 이르자 포술장교가 포격전의 사격준비를 우현으로 할것인지 좌현으로 할것인지 물었다.
어느덧 거리 8,000m가 되자, 도고는 오른손을 높이 들어 왼쪽으로 반원을 그리는 모습을 보였고, 선두에 있던 기함 미카사는 크게 좌현으로 돌기 시작했고 러시아군 앞에서 대반전하는 일명 ‘정자전법’ 혹은 ‘도고 턴’의 개시였다.
결과[편집]
일본 해군이 승리했고, 러시아 발트해 함대는 전멸했다. 일본에서는 일본해 해전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동해 해전이라 부른다. 이후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에서 상당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목차 [숨기기]
1 배경
2 전투 과정
3 결과
4 참가 병력
4.1 일본 제국 해군
4.1.1 제1함대
4.1.2 제2함대
4.1.3 제3함대
4.1.4 특무함대
4.2 러시아 제국 해군
5 기타
6 같이 보기
7 참고 자료
8 각주
배경[편집]
러일전쟁 중 러시아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함대를 동원한다. 하지만 일본 해군보다 3배나 많은 함대를 보유하면서도 각 지역에 흩어진 러시아 함대를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흑해 함대는 오스만 제국 때문에 출동이 불가능했기에 출동 가능한 함대는 태평양 함대[1] 밖에 없었다.
러시아 해군 사령부는 태평양함대만으로는 일본함대에 대항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발트 함대[2] 와 니콜라이 네보가토프 제독이 이끄는 제3태평양함대를 추가로 파견했다.
그러나 여기서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했는데 주력함대를 유럽에서 동아시아까지 이동시키는 일은 당시로써는 처음 있는 일이었고, 함대의 대부분이 증기선이기에 항상 석탄 공급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시로 보급할 수 있는 항구가 필요했고, 또한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야만 했다.
그런데 러시아는 이들 항구와 운하를 지배한 영국과 사이가 매우 안좋았다. 1904년 10월 21일 북해에서 일어난 도거 뱅크 사건에서 러시아 해군은 영국 어선을 일본 어뢰정으로 오인하고 공격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당시 영일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은 일본을 지지했고, 스페인에게 러시아 발트 함대에 보급을 하지 말라는 압력과 함께 영국 식민지 항구에도 발트 함대의 입항을 금지시켰다.
사실상 수에즈운하 통과도 일부 함대만 가능하여 함대를 둘로 나누어 제2태평양함대 주력은 아프리카 대륙 남쪽 끝 희망봉을 돌았고, 함대는 마다가스카르 섬의 노스베항에서 합류했다.
이후 인도양에서는 러시아의 우호국 항구는 매우 적었고, 동맹국 프랑스에게도 냉대를 받아 약 반년간의 항해는 피로가 극에 달했고, 사기도 매우 저하되었다. 제2, 제3 태평양함대는 1905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캄란 만에서 합류한 뒤 블라디보스토크를 목표로 항해를 시작했다.
한편 일본 연합함대는 동아시아에 있던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황해 해전과 울산 해전에서 격파해 무력화 시킨 뒤 발트 함대와 대결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발트 함대를 어디서 맞아 싸워야 하는 것이었다. 캄란만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항로는 3곳으로 쓰시마 해협, 쓰가루 해협, 소야 해협이었다.
러시아 함대에 비해 세력이 열세인 일본 연합함대는 이중 1곳에 전력을 집중시켜야 했다. 일단 2곳은 거리상 및 기뢰에 의한 방어가 튼튼했기에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쓰시마 해협을 통과할거라 예상하고, 한반도 남부해안에 주력함대를 배치하고 경계망을 폈다.
5월 14일 발트 함대가 캄란항을 출항했으나, 5월 19일부터 소식이 묘연했다. 발트 함대의 진로를 알 수 없게된 일본 연합함대는 초초해지기 시작했고, 발트 함대가 태평양에서 홋카이도로 향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있었다.
5월 24일 도고는 일본 대본영에 연락해 홋카이도로 이동하고자 한다는 전보를 보냈고, 대본영에서는 일단 신중하게 기다리라는 연락이 왔다. 도고는 5월 26일 정오까지 기다리다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5월 26일 오전 발트 함대의 석탄운반선 6척이 상해에 5월 25일 저녁에 입항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운반선이 함대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것은 항속거리가 긴 태평양 루트로는 가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것으로 도고는 쓰시마 해협에서 발트 함대를 기다리기로 했다. 만약 운반선이 하루라도 늦게 입항했다면 도고의 함대는 홋카이도를 향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1905년 5월 27일 오전 2시 45분, 규슈 서쪽해역 203호 지점에서 연합함대의 순양함 시나노마루가 발트 함대의 병원선 오룔의 조타를 발견했고, 뒤이어 발트 함대의 모습을 확인하고 4시 45분에 “적함 발견”이란 의미가 있는 "타타타타타"(실제 타의 연속)로 시작되는 “적함 203지점에서 나타남 0445”을 타전했다.
곧 시나노마루는 순양함 이즈미와 교대 후, 적에게 발견되지 않게 이탈했다. 이즈미는 적의 위치와 방향을 무선으로 연합함대에 통보했다.
전투 과정[편집]
1905년 5월 27일 ~ 28일의 해전
시나노마루가 야간에 병원선을 발견한것은 병원선이 조타관제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발트 함대는 시나노마루가 무선으로 통보하는 동안에도 포격을 가하지 않았고, 전파방해도 하지 않았다.
강력한 무선기를 갖고 있던 우랄 함장의 방해전파 발신허가에 대해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일본측의 무선을 방해해야 하나”라고 명령했다. 시나노마루가 야간동안 발트 함대를 관측하면서 전파를 발신하는 동안 러시아 함대는 이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당시 무선방위 측정기는 실용화 이전이었다)
5시 05분 한반도의 진해만에 대기중인 연합함대가 출항했다. 바다가 거칠었기에 원래 계획이던 기뢰작전은 하지 않고, 포격전 위주로 전투를 진행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10시 최초로 달려온 연합함대 제5,6 전대가 발트 함대를 확인했다. 11시 최초로 발트 함대에서 위협 포격을 가했고, 서로간의 포격이 벌어졌으나 전투 상태로까지 번지지 않고 일정거리를 유지했다.
양쪽 모두 1발의 명중탄도 없었으나 이때 일본 연합함대의 일부가 발트 함대 앞을 가로지르기를 몇번을 하여 발트 함대는 대열이 2열종대에서 3열종대로 바뀌었고, 순양함 함대는 후열로 밀리게 되었다.
13시 39분까지 연합함대의 모든 함대가 집결하고, 연합함대 주력 제1, 제2 전대가 발트 함대를 좌현 남쪽에서 시야로 확인하자 전투 깃발을 내걸고 전투 개시를 명령했다. 13시 55분 도고는 연합함대 기함 미카사에서 Z기를 기양하라고 지시했다. Z기는 "황국의 흥폐, 이 전투에 달려있다. 각 대원은 한층 분발노력하라."라는 의미를 가진 신호기였다.
14시 2분 침로를 남서로 정한 연합함대와 침로를 북동으로 정한 발트 함대는 반항로(평행과는 다른)상에 있었다. 14시 3분 양측 함대의 거리가 11,000m까지 접근했다. 거리 8,500m 에 이르자 포술장교가 포격전의 사격준비를 우현으로 할것인지 좌현으로 할것인지 물었다.
어느덧 거리 8,000m가 되자, 도고는 오른손을 높이 들어 왼쪽으로 반원을 그리는 모습을 보였고, 선두에 있던 기함 미카사는 크게 좌현으로 돌기 시작했고 러시아군 앞에서 대반전하는 일명 ‘정자전법’ 혹은 ‘도고 턴’의 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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